다소 진부한 이야기

무제의 untitled 3

검은튤립_ 2011. 12. 27. 20:14
- 그 세계는 이 곳, 그러니까 현실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어요.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지요. 물론 좋고 나쁨의 기준이 다르기도 하고, 또 그 생김생김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신이요? 이건 비밀입니다만, 그 세계에서는 제가 신이예요. 모두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그 중 일부는 신, 그러니까 저의 존재를 믿고, 또 일부는 믿지 않지요. 여기 모인 우리들이 그런 것 처럼요.
  어쨌든 이렇게 한 번 세계를 만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제가 할 일은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이예요.
  다음은, 그렇게 들은 얘기들을 여러분께 전하는 거죠.

그가 그의 작품에서 그리는 것은 실재하는 세계였으며, 실제로 벌어졌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조물주였던 것은 아니었고, 세계 따위를 창조해 본 적도 없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사실, 그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살았던, 다른 세계에서 그가 보고, 겪고, 혹은 들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의 데뷔작은, 그러니까 자신의 첫사랑 얘기였다.
물론 전에 살던 세계의 기준으로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것이 그의 연애담이었으나.
거기에 묘사된 다른 세계의 생활상은 이쪽 세계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만남과 구애 그리고 갈등과 같은 그쪽 세계에서는 흔해 빠진 연애 과정이, 이쪽 세계에서 환상적이며 또 낭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야기의 마지막, 그가 2년 동안 행성 방위의 임무를 위해 떠나기 위해 연인과 이별을 하는 장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주목받기 시작한 그의 두번째 이야기는, 아니나 다를까 그의 두번째 연애담이었다.
전체적으로 첫번째 이야기와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논란을 일으켰다.
다른 세계의 애정 행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많은 독자들은 해당 부분에서 무의식중에 '데카르챠!'라는 의미 모를 감탄사를 외쳤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는, 장편을 쓰기로 마음먹었으나, 그 전 세계에서의 인생 중 가장 드라마틱했다고 생각한 두 번의 연애담을 모두 써 버린 이상, 자신이 직접 경험했더 이야기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과목인, 역사를 공부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자신이 살던 세계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 똑같이 옮겨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거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 저희랑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 당신들 뭡니까? 경찰?
- 맞습니다.
- 이유가 뭐죠? 내가 뭘 잘못했어요?
- 가 보시면 압니다.
- 무슨 소립니까 신분증을 먼저... 어?!?!?!

'나무'로 된 '단상' 위에는 '종이'를 엮어 만든 두꺼운 '책'이 있고, 커다란 '의자'에는 '여자'가 앉아있다.
그러니까 이 곳은, 재판정이다. 하지만 이건 전에 살던 세계가 아닌가.

- 선고합니다. 피고소인은 세계, 그리고 우주의 창조자인 고소인이 만든 세계를 그대로 모방하여, 마치 자신이 만든 세계인 양,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로, 반론의 여지도 정상참작의 여지도 없습니다. 따라서 본 법정에서는 피고소인에게 사형을 선고...
- 뭐... 뭐뭐뭐... 뭡니가 이건!
- 닥쳐요. 두 개의 세계를 살아봤으니 짐작 가능할 거에요.
  우주의 법정이, 당신이 살던 두 세계 중 하나의 법정과 똑같이 생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지금 보이는 이 곳 '법정'은 그저 당신의 취향에 맞게 렌더링되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그저, 이미 결정된 재판의 결과를 당신에게 통보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 ...
- 계속 하자면, 사형을 선고한다는 건 농담이고. 판정 결과, 우리는 고소인의 뜻대로 당신에게 우주사회봉사를 명령합니다.
- 우주사회봉사라니, 그게 뭡니까, 아니 그보다 우주 법정에서는 농담도 막 하고 그래요? 사, 사람 목숨을 놓고?
- 우주의 법정이 당신이 살던 세계의 법정과 같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또 다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할 경우에는 법정모독으로 사형입니다.
- ?!
- 농담이고, 우주사회봉사 명령은 진짜예요.
- ... 어떻게 우주사회봉사를 해야 합니까.
- 당신의 세계에서,  그 분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 아니 무슨 우주의 창조자 씩이나 되는 양반이 이런 걸로 치사하게 고소를 하고, 봉사 명령 따위를, 법정을 통해서 내립니까.
- 우주의 법칙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두 세계를 살아본 당신은 잘 알겠지만, 그 분이 만든 세계들은 모두 각각 달라요. 독창적이죠.
  하지만 몇몇 이유, 그러니까 관리상의 이유라던가, 언젠가는 올지 모를 대 통합과 같은의 이유로, 각 세계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기를 원하시죠.
  당신처럼, 그 전에 살던 세계에서의 기억이 삭제되지 않은 채, 다른 세계에서 태어나는 존재가 생기는 것이 그 덕분이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매개체로, 두 세계는 서로 어느 정도의 유대를 갖고, 조금씩 동기화하게 되는 거죠. 일종의 외교관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 아니 그러면 제가 지금 살던 세계에서, 그 전의 세계의 기억을 전하는 게 다 의도된 거란 거 아닙니까?
  그럼 왜 고소를...
- 아 그건 그냥 그 분이 그냥 고소라는 퍼포먼스를 좋아해서...
  그냥 당신의 새로운 사명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 하필 당신인가는 그 동안 당신이 임무를 잘 해 왔기 때문이구요.
- 아...
-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납득하시는군요.
- 후... 하여간 그래서 제가 전할 그 분의 뜻, 제 새로운 사명이 구체적으로 뭐라는 거죠?
- 그 분을 찬양하세요.
- 네?
- 당신이 살던 세계, 그리고 다른 세계, 이 모든 우주를 만든 것이 그 분임을 널리 알리고, 찬양하세요.
- 그게 끝입니까?
- 끝입니다.
- 이 우주를 만든 양반을 찬양하는 글을 쓰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압니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도 이제 알게 된 마당에, 세계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우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게 뭐람.
-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 방법은 오직 그 분만이 알고 계시죠.
  우주를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면, 누군가, 아니 당신도 또 다른 우주를 만드려고 하지 않겠어요?
  그 분이 바라는 것은 그저,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서, 찬양을 받는 것이예요.
- 이 무슨... 우주를 만든다는 게 알려주면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겁니까 설마...
- ... 그건 저도 잘 모르겠고, 하여간 그래요.
- 하... 이 명령을 거부할 권리 같은 건 없겠죠 물론? 신의 뜻이니까요?
- 물론입니다. 당신은 그의 종이며, 죽기 전까지 당신이 쓸 수 있는 글은 오직 그 분에 대한 것 뿐이예요. 속박에 걸린거죠.
- ... 그 양반 이름이나 좀 압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그가 살던 세상 - 두번째로 살던 세상 - 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명대로, 신을 찬양하는 서사시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가 전에 살던 세상이나,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역시 알지 못했기에, 전처럼 자신의 경험이나 혹은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에는 별 재능이 없던 그였던 터라, 가까스로 출판된 책에 대한 독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출판사에서는 결국 그의 서사시를 더 이상 출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그가 예전에 썼던 것과 같은 얘기들을 다시 쓰기를 바랐지만, 속박에 걸려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신 이외의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마다 몸이 무엇에 잡히기라도 한 듯 꼼짝 할 수 없었기에, 그는 팔리지도 않고 출간되지도 않는 신에 대한 얘기를 계속 쓸 수 밖에 없었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잃은 그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급기야 신을 원망하기 시작하게 된 그는, 신에 대한 챤양을 쓰는 대신 조롱을 쓰기로 결심했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내용이 어찌됐건, 신을 이야기하면 그만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만든 이야기라면 모르지만, 세상을 망친 이야기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가 살던 세계의 총통의 이야기를 쓰면서 - 물길을 튼 이야기라던가 - 거기에 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이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던 그는, 책의 후반부에 그가 두 세계를 살고, 우주 법정에서 겪은 일이며, 신 이야기를 제외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 덕분에 그의 작가 인생이 끝난 것까지 밝히고, 신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죽고 한참이 지난 후 출간이 되었으며,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은 어느 집이나 한두 권 씩은 있을 정도로 날개돋친 듯 팔렸고, 세상을 망치고 사람을 망친, 신의 이름을 조롱하고 욕하는 것은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어떤 신의 이름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좋지 못한 일이 닥쳤을 때 사용하는 관용어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게 다 Bjonk神 때문이다. 내가 그 Bjonk神 때문에 살 수가 없다."
<The Call of Bjonk神 에서 발췌>



RJD2 - Ghostwriter



*. 신에게도 생명이 있으며, 자신의 창조물이 그를 인지하고, 관심을 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그 생명력을 얻는다.
    어떤 신은 자신이 찬양 받기 위해 창조물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하며,
    또 어떤 신은 경외심을 얻기 위해 자연재해와 같은 방법으로 창조물을 핍박하기도 한다.

    방법이야 어쨌건 간에, 병ㅋ신은 오래 살았다.
    덕분에.